먼지의 집

 

 내 방에는 먼지가 많다. 자취생들이 으레 그렇듯 청소를 자주 하지 않는다. 개 수대에 설거지 거리는 산재해 있고 식탁 위에도 먼지가 붙어있다. 가끔 바퀴벌레도 기어 다닌다. 하 지만 이곳은 도시. 빼곡한 나무들의 모임이라든지, 짖어대는 개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곤충을 보면 그들의 생명을 생각해 줄 겨를도 없이 해충으로 규정해, 죽이기에 바쁘다. 수만 갈래의 나뭇가지를 감상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들의 거친 줄기를 지나간다. 내 방에 쌓인 먼지와 머리카락들도 오직 치워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먼지의 집에 있는 시의 주인공들은 분명 나도 많이 보았던 것들이다. 파리부터 시작해서 뻣뻣한 노가리에 이르기까지. 해충을 잡을 때, 이들도 생명이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나타내는 것만큼 속 깊은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 래서 여기 써진 것은 시가 되고 이것을 쓴 사람은 시인인가보다.

단순히 사물을 자세히 관찰해서, 그리고 조그만 상상력을 보태어 쓴 시가 아니었다. 새끼를 좋은 곳에 낳으려는 구더기, 일상 쫓겨 다닐 새끼를 걱정하는 파리, 고 삐에 메인 염소와 돌아갈 곳 없는 망둥어 등, 소재들의 삶에 인간의 일상이 투영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보통 장승이나 커다란 나무가 서 있다. 이 먼지의 집이 있는 마을로 들어서자 오동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붙들고 흔들면 달빛이 쏟아진다고 한다. 밤 이 배경이 되어 편안한 마음을 만들어 주었다. 시집 초행길의 거부감을 고향집 가는 것처럼 해 주었다. 나무를 보고, 달빛을 보고, 벌레를 보고 말한다. 벌 레의 행동을 궁금해 하는 시인의 말에서 여유로움을 느꼈다. 도시에서 울려대는 소음이 없는, 저 적막한 한 시골에서 벌레의 안부를 물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움. 시인이 말한 고요함에서 잊고 있던 흙내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많은 이들과 만나게 되지만 그 중 달팽이가 내 관심을 끌었다. 평소에 생각하길 달팽이는 꾸준한 노력의 상징이 아니던가. 집 한 채를 둘러메고 끝없이 정진하는 그런 노력의 상징. 그 러나 이 곳에선 집이 아닌 짐이었다. 달팽이의 꿈과 희망을 속박하는 짐이었다. 내가 가진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현실이란 짐을 말하고 있었다. 달팽이는 오직 춤추고 싶다는 일념 하에 몸집을 삼킬 듯한 짐을 지고 물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달팽이가 짐을 이끌고 물가로 가는 단순한 과정에도 많은 고민이 있다. 복잡하게 남들과 연루된 생의 무거움을 짊어진 인간은 더욱더 많은 고민을 떠안고 있다. 달팽이의 연체 껍질보다 약한 마음으로 살아가긴 너무 버겁다. 덤프트럭의 흉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은 인간이 더 절실하다. 달팽이도 쉽게 살아가려 애쓰는 것이 인간과 마찬가지였다. 감 질나게 주어지는 미세한 희망 조각을 먹으며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집 밖에서 달팽이를 만난 후, 집 안으로 들어서면 너무도 흔하게 부딪혀 왔던 파리가 얘기를 한다. 언 제 움직일지 모르는 숟가락 위는 물론, 여기저기 앉아본 파리. 그의 존재는 저울 눈금하나 변화시킬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다. 그 홧김으로 그런 것 일게다. 파리는 이곳저곳에 알을 까고 싶어 했다. 자신과 같은 존재를 늘리고 싶어 했다. 인간이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남기며 여기저기 기웃대는 것처럼 파리가 그랬다. 자식을 낳는 것은 제 존재의 연속을 의미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 나 또한 그렇게 파리처럼 파리만큼 인식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우주에 있어 나란 존재는 파리와 같았다. 그래 도 내가 존재하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들에 게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지만 절대적인 우주의 저울은 눈금을 움직여 주지 않는다. 파리는 결국 간장 위에서 자신과 똑같은 삶을 겪을 자식들을 죽어가며 지켜볼 뿐이다. 윤회의 고리를 밟고 사는 것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닌가 보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다는 것은 관계없이 내 자식 또한 어떤 삶을 겪을 것이다. 내 자식 또한 파리 새끼들처럼 밥상보를 들추고 밥 먹으려 살아야 할 것이다. 덧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파리나 나나, 내 새끼나 파리새끼나 모두 매한가지가 아닌가! 어느 생명하나 가볍게 대할 수 없다. 그들의 존재는 내 존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주의 저울로 재보면 마찬가지다.

밥상 앞에서 마주쳤던 생선구이.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살들을 발라먹었었다. 그 생선도 과거가 있었다. 그 생선이 살던 곳에서 평화로웠든 괴로웠든, 누군가에게 잡혀버린 순간은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쉽게 감기지 않는 눈은 놀람뿐만 아니라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생선이 살아있었던 과거, 우리는 그것을 먹고 있다고 이해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지금만을 사는 것이 아니다. 과거부터 흘러들어온 모든 것을 먹으며 과거의 연장선 위에 사는 것이다.

통통하고 생기 있던 생선구이와는 대조적인 노가리가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안식을 찾은 노가리가 있었다. 살 아가면서 받았던 수많은 상처. 그것을 견디는 인내의 끝에 도달한 노가리는 행복하게 입만 벌리고 있다. 죽으면 노가리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겠지. 그리고 몸에 먼지가 쌓이는 것을 모두 허락할 것이다. 그것은 먼지가 되기 전의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상처 받았는가’가 아닌 ‘얼마나 잘 견뎌냈는가’이다. 여기 이 노가리처럼 이 세상을 떠날 때, 내 몸뚱이에게 잘 견뎌냈다고 칭찬해 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생기는 마음의 상처들에게도 격려해 주어야 한다. 평생의 인내를 몰아낼 그 순간까지는, 길이 끝나기 전까지, 공기가 내 몸 안에 자리 잡기 전까지는 인내로 몸 안을 가득 채운 채로 살아야 한다.

성환(成歡)에 이르러 철길이 보인다. 기와 집도 보이고 젖소, 파리, 말똥구리가 보인다. 노을도 보인다. 이곳의 젖소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똥을 깔고 앉아있다. 눈에 비춰지는 노을이 그들에겐 의미가 없다. 이렇게 한가하고 권태로운 곳에서 노을만 도망친다. 노 을은 마치 탈출구 같다. 긴 터널처럼 지겨운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터널 끝은 노을이다. 그 런데 그 노을이 계속 도망치기에 피를 말린다. 현실을 빠져나가고 싶지만 그 빠져나가는 방법은 노을처럼 가까워 보이면서도 도망치는 죽음이다. 해질 무렵, 노을을 보면 그 야릇한 색채를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삶을 어렵게 유지하고 있을 때, 죽으려고 하면 금방 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그렇지 않다. 어려울 때, 죽음은 도망친다.

커다란 고분이 모여 있는 경주. 누구나 한번쯤 가보았을 그 곳은 분명 무덤이다.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역사학 측면에서 자료라고 말해도 하나의 무덤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과거의 추억 때문에 답답해하고 괴로워 하다가, 그것이 너무 알려져 누구나 알아버리면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된다. 이 제는 그 추억을 다시 그리워한다. 남들이 알기 전, 그 괴로워하던 때도 추억의 일부분이 되어 버리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다. 출토 되어버린 부장품처럼 돌아갈 수 없다. 그 래서 다시 그 위에 앉아 술을 마실 뿐이다. 추억에 갇혀 괴로워하다가 추억을 그리워하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을 느꼈다. 설령 작가의 의도는 아니라고 해도.

판교리까지 왔는데도 시의 색깔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골의 향내가 나는 듯 했다. 그저 푸근하지만은 않았다. 쇠락해가는 마을. 산불과 폐가, 폐광촌이 저물어버린 잉카 문명 같다고 얘기했다. 그 마을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버스와 병쪼가리에서 묻어났다. 물앵두꽃과 이제 보이지 않는 금가루, 백열등과 같은 소품들이 마을의 자잘한 희망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엿장수가 돌아올 것만 같은 그 밤은 누구에게나 있는 막연한 기대의 밤이다.

열매나 잎을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하는 나무, 측백나무. 갖가지 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이 나무가 어머니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집 전체를 일관지어 오던 암울하고 해질 듯한 분위기는 죽음의 냄새, 황혼으로 고조되었다. 아무리 늙어도 가슴 속에서 죽지 않는 어머니, 그러나 이 곳에서 떠나 돌아오지 않을 어머니, 황혼과 함께 서쪽으로 가셨다. 주 위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 그 당시의 기분뿐만 아니라 몇 년이 지난 후의 기분까지 담담하게 공감되어 왔다. 떠나가는 사람은 남은 사람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새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는 나를 위해 병풍을 쳐주었다 

떠나는 나를 위해 

배꽃 피고 지는 마을 하나를 다 가려주었다 

이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를 위해 

끔찍한 나를 위해, 내 마음의 열병을 위해.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

 

<측백나무 3 - 간이역 전문>

 

조금이라도 흔적을 지우려고 떠난다. 아픈 기억들이 바스러져 먼지가 된 이 곳에서 떠나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은 추억과 먼지. 먼지가 쌓이는 것은 추억이 쌓이는 것과 같다. 마을에는 그런 먼지들이 가득했다. 그래서 떠나야 했다. 그 떠나는 길에 돌아볼 수 없게 기차는 병풍이 되어 주었다. 아프지 못하게 병풍이 되어 주었다. 늘어선 ‘땡’이란 글자는 끊임없이 내 머리를 울렸다. 눈앞에 지나가는 기차가 저 글자를 통해 보였다.

시집이 란 건 그저 시를 모아놓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시인들은 시집 전체를 생각하고 있었다. 곤충과 동물로 삶을 보여주는 시가 맨 앞에 서서 시선을 끌었다. 오래 전 우화를 읽던 기분과 흡사했다. 또 친숙했다. 시는 어렵다는 통념을 망각한 채로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더 들어갔더니 이번엔 일상에 널린 것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라 면국물 위에 앉는 먼지와, 거리의 빙판, 경주의 고분 등이 자기 얘기를 했고 그곳엔 심장소리 들으며 잠들려고 애쓰는 내가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시들이었지만 모두 하나의 시선으로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집 얘기를 꺼내지만 결코 집 얘기가 아니다. 분해된 집들의 구조물들이 있었고, 측백나무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이야기였고, 그것을 통해 다시 바라보는 나의 이야기였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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