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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를르는 누구인가

-엠마는 어디서 도망치려 했는가-

 

 

많은 지면이 보바리를 위해 할애되어 있다. 그러나 소설은 보바리의 남편인 샤를르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한다. 교 실에 들어오는 어벙한 신입생은 샤를르 보바리다. 순하고 반항할 줄 모르는 아이다. 주 위 시선을 의식하며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아이다. 부모가 시키는 공의 시험에 낙방을 경험하고도 다시 공부하여 합격한다. 이 아이는 청년이 되어 결혼을 할 때도 부모의 의견을 따른다. 그 는 결혼을 해도 독립하지 못한다. 부인은 그를 지배하려 하고 그는 부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엠마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루오 영감의 딸인 엠마는 도회지 아가씨이다. 샤를르의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엠마와 재혼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는 엠마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는 구혼했고 결혼했다. 그러나 엠마는 곧 시들해진다. 이후, 엠마의 행동은 마치 샤를르의 과거를 풀어놓은 듯하다. 아마 그의 아내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 리고 그가 도회지에서 자라났더라면, 혹은 그의 결혼 생활에 대한 권태가 일찍 찾아왔더라면 아마도 엠마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작가는 왜 여성으로 소설의 주체를 교대시킨 것인가. 사회와 관습에 순응해온 샤를르를 일반적인 사회로 인식하면 보바리가 그 사회와 통념을 벗어나려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엠 마는 마음껏 모든 것을 누리려한다. 집안 살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시 어머니와의 인간관계도 고려하지 않는다. 남편과 딸과 자신의 혈연관계보다도 자기만의 사랑을 우선한다.

이 같은 엠마의 이기주의는 그녀의 삶을 샤를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샤 를르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엠마는 그가 옆에 있음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항상 옆에 존재하는 인물로 여겼다. 그가 필요할 때만 찾는 모습도 보인다. 그녀가 수상한 모습을 보여도, 그녀가 신경질을 부려도, 샤를르는 그녀를 위해 배려했다. 엠마를 위해 행동했다. 그러나 엠마는 그것을 발판삼아 자신의 불륜을 더욱 자유롭게 즐겼다.

그렇다면 샤를르는 착하고 긍정적인 인물인가고 엠마는 더러운 인물인가. 사회라는 큰 억압 아래 두 인물을 놓아두면 그 행동은 대조적이나, 둘 다 긍정적이지 못하다. 독 자는 어느 쪽의 생각도 흔쾌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샤를르는 모든 상황과 모든 인물에게 순응한다. 이는 이폴리트의 다리를 수술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주위의 충동질에 쉽게 흔들린다. 결국 작가는 두 인물을 극단적인 행동 양식으로 규정하고 어느 쪽도 옳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샤를르의 삶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자신의 뜻대로 단 한 번도 살지 못했다. 그는 부모의 억압 아래 자라났으며, 아내의 억압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자 신의 뜻대로 선택한 결혼 상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받지 못하면서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뒤에서 가산을 탕진했다. 그녀의 사후에 그는 또 그 빚을 갚아나가다가 그의 생을 마감했다. 엠마와 관련되지 않은 그의 삶을 작가가 조명한 이유는 앞서 언급했던 인물상, 즉 엠마와 정반대의 행동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지면을 보바리 부인의 일탈에 할애하면서 샤를르의 삶으로 소설을 시작하여 그의 죽음으로 끝내고 있는 형식으로 봐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소설에서 자연 묘사는 엠마가 샤를르를 피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다닐 때 주로 쓰인다. 이는 아름답지만 소설의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조금 지나친 감이 있고, 사랑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 저 있는 그대로 보라는 자연의 의미를 부여한 듯하다. 샤를르와 엠마의 행동을 직시하라는 듯. (2006.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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