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글동네/리뷰 2008 2010. 4. 11.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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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문체의 변화 

-퇴원, 조만득 통해- 

 

  

 

1. 이청준 단편소설 

 

이청준은 1965, 사상계사의 신인 작품 모집에서 단편 퇴 원으로 등단했다. 이후, 그는 꾸준히 활동하여 단편과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많은 작품을 발표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 세계가 여러 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고, 소재와 주제도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이청준이 여러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문체 또한 여러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독자에게 상징을 어떻게 전달하는지, 퇴 원 조만득라 는 단편소설로 살펴본다. 조만득 1980년에 발표되어 퇴원 15년이란 간극이 있다. 두 소설은 모두 병원이라는 배경에서 시작된다. 같은 배경아래 주제를 전달하는 문체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본다.

 

2. 공통점 - 간접 묘사 

 

나는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바로 눈앞에 와닿았다. 막 연한 상념이 누워 있을 때나 한가지로 유리창을 흐르고 있었다. 명색이 2층이었으나 무질서하게 솟아오른 건물들로 안계(眼界)는 좁게 차단되고 있었다. ……(중 략)……내게는 그 비슷한 데다 무얼 잊어 놓은 기억조차 없는데, 마치 그런 것이라도 찾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착각이다. 착각보다 더 막연했다. 이 조그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풍경의 이미지는 그만큼도 구체성이 없었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한다면, 그 건물들 사이로 U병원의 탑시계가 건너다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오래 전에 고장이 나서, 항상 같은 점에만 서 있는 두 바늘을 아주 떼어 버렸기 때문에 시간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퇴원에서 화자는 ‘나’다. ‘나’는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다. 주인공은 서두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있는 곳과 보이는 것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주변을 묘사하는 단락은 한 페이지가 넘게 한 단락으로 유지된다. 이 단락에서 주인공은 ‘막연한 상념’, ‘잊어 놓은 기억조차 없는데, 마치 그런 것이라도 찾고’, ‘착각이다. 착각보다 더 막연했다’는 등, 연이은 묘사들로 주인공의 현실 감각을 표현한다. 주 인공은 뚜렷한 사고를 통해 무언가를 판단하고 있지 못하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어지러운 상태를 표현한다. 생각이란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 무력한 상태의 주인공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작가는 이 무력한 상태를 시계 바늘 없는 시계탑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 계 바늘 없는 시계는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아 시계로서의 구실을 못하고 있다. 시계탑은 바늘을 달라고 호소할 수도 없으며, 그럴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의 현 상태 또한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병실에 누워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과거를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상태를 인물이 보는 풍경의 묘사로 표현했다.

() 한마디를 떨어뜨려 놓고 미스 윤은 바삐 문을 나가 버렸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차츰 멀어지자 나의 가슴속에서도 역시 그 바이올린의 고음 같은 율동감이 긴 선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담요를 차고 일어나 앉았다. 창문이 눈앞에 와닿았다. 블록 담벼락 밑으로 흐르는 그 한 줄기의 보도는 조용히 밤으로 가라앉고 어둠을 빨아들여 빛나기 시작한 U병 원 탑시계의 파란 형광이 곱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 빙글빙글 웃으면서 준은 가방을 열고 포장이 요란한 병을 하나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놀라기는 미스 윤이 오히려 더한 모양이었다. 펜 을 쥔 손을 엉거주춤 쳐들고 다가와서 레테르를 들여다 보았다.

 

()에 서는 ‘바이올린의 고음 같은 율동감’이라든지, ‘어둠을 빨아들여 빛나기 시작한 U병 원의 탑시계’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 주인공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다시 ‘창문이 눈앞에 와닿았’고 주인공은 다시 무기력한 상태로 빠져든다. 끊임없이 미스 윤이 과거를 떠올리라고 자극함에도 불구하고 생각하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묘사에 쓰인 단어의 선택이나 발상이 이청준 특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묘사가 주위의 사물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만 띄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주제까지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 인공은 바깥을 보고 있어서 그 풍경이 묘사되는데, 그 창밖은 주인공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 이 와 같은 묘사가 작품의 전체를 차지한다면 독자는 작가가 이 부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상징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러나 다른 부분의 서술은 모호하지 않은, 익숙한 단어와 표현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 청준은 ()처럼 움직임이나 타인에 대한 설명은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단어를 사용했다. 동작을 묘사하거나 물건을 지칭하는 명칭도 매우 세세하고 분명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만득 씨가 병원을 찾아온 그 첫날에 이미 그의 운명을 점치고 있었다. 조만득 씨의 증세를 진찰하고 그에 대한 무수가시료를 추천한 것이 바로 이 병원 정신과의 책임자 민창호 박사였기 때문이다. 그 민창호 박사의 담당으로 조만득 씨의 병태는 어김없이 정상을 회복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 박사의 진단이나 처방은 그만큼 정확했고, 환자를 돌보는 진료태도 또한 누구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중 략)……그 과대망상증 환자들에 대한 민 박사의 진료는 언제나 절대적이었고, 치유도 그만큼 정확하고 신속했으니까. 그런 민 박사의 기억이나 인상이 미스 윤에겐 그가 처음부터 그쪽 환자들만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조만득 일부분이다. 과대망상으로 무수가입원한 조만득에 대한 미스 윤의 생각이다. 미스 윤은 민 선생이 조만득 씨를 치료하리라 믿고 있다. 치료라는 것이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며 옳은 일이라고, 민 선생이 믿고 있음을 미스 윤이 전달한다. 미스 윤은 끊임없이 ‘과연 행복하게 미친 사람들을 치료해도 좋은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꾸준하게 민 선생에 대한 믿음을 바꾸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작가는 미스 윤이 고민하는 모습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민 선생이 ‘치료’라고 믿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독자가 민 선생의 판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미스 윤의 두 가지 관점을 모두 드러낸다. 위에서 볼 수 있듯, 미스 윤의 생각을 그대로 서술했다. 민 박사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미심쩍은 느낌을 그 후에 다시 드러낸다.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꾸준히 소설에 대비시켜 서술한다. 퇴원에 서 주인공의 상태에 대한 묘사를 주위 움직임에 대한 구체적 서술과 대비시켰다면, 조만득에서는 미스 윤의 두 가지 관점을 뒤이어 서술하여 대비시킨다. 이로 써 그 서술에 들어있는 상징을 독자가 더욱 분명하게 주제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3. 차이점 - 결말 

 

마지막 음절에서 자동적으로 입을 폐쇄당하고 나서, 나는 몇 번이고 이 단어의 이미지를 실감했고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 연극의 본질에까지도 어떤 예감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언어가 완전히 소멸된 거기에는 슬프도록 강한 행동의 욕망과 향수만이 꿈틀거렸다. 허나 나에게는 이미 그 욕망마저도 죽어 버리고 없었다. 완전한 자기 망각. 그렇게 나는 시체처럼 여기 병실에 누워 있는 것이다.

 

음식을 먹고 싶은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이라고 외치는 청년을 보고 ‘나’는 판토마임을 떠올린다. ''받침이 침묵을 강요한다고 생각하고, 그 판토마임의 동작에서 침묵 속에서 울부짖는 욕망을 본다. 그 것마저 없는 자신을, 청년에게 있는 욕망이 없는 자신을 본다.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던 자신의 무기력한 상태를 깨닫는다. 누워서 간호사의 발소리를 듣고, 오줌을 맡기고, 그녀의 일방적인 대화를 듣던 ‘나’는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주인공은 과거의 기억을 꺼내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강하게 작가의 결론이 반영되어 있는 결말이다. 작가가 후에 밝혔듯이, 이 작품은 당시 작가의 막막한 처지와 자기회복의 소망을 표현했다. 미스 윤과 친구를 회복을 지켜봐 주는 사람으로 설정했다. 이를 오생근은, 인 물이 자기 자신을 떠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작가가 고통에서 얻어진 결론을 보여준다기보다는 고통의 과정을 진술한다고 하였다. 이후에 나타나는 작품에서는 이 과정을 서술함에서 한층 더 나아가, 과 정을 완결시키는 몫을 독자에게 넘긴다.

 

-민 박사님이나 저도 조만득 씨가 돌아가야 할 현실의 일부가 아닐까요.

-우리가 그의 현실의 일부라면 우리에게도 그의 병세의 변화에 대한 책임의 일부가 있는 게 아닐까요.

-조만득 씨의 병태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이란 그를 자신의 현실로 돌아가게 하고, 그가 자신의 현실과 맞서게 하는 데에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끝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요. 과장님께서는 언제나 그가 현실을 외면하고 달아나는 쪽만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거꾸로 그가 현실을 못 견뎌서 그에 대한 복수로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현실 쪽을 깨부숴 버리려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미친 상태에서의 행복함은 진짜 행복일 수 없으며 그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미친 사람을 다시 괴로운 현실로 보내야 한다고 민 박사는 주장한다. 미스 윤은 그 행복이 가짜임은 납득하지만 괴로운 현실로 다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한다. 민 박사는 듣지 않는다. 미스 윤은 결국 끝까지 묻지 못하고 조만득은 가족을 죽이고 자백한다.

민 박사의 생각은 논리에 맞는 생각이고 납득이 가는 생각이다. 그러나 작가는 의문을 꾸준히 미스 윤을 통해 제시한다. 미스 윤이 민 박사에게 직접 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민 박사에게 묻지 못한 말들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마치 독자는 자신이 질문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 조만득이 가족을 죽인 결말은 이미 소설의 사이사이에 서술되어 있는 대목들로 짐작할 수 있다. 중 요한 것은 질문이다. 어느 쪽이 옳은 지 고민해 보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 전반에 걸쳐 미스 윤의 생각을 직접 나열하여 독자가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생각하도록 했다.

 

4.  

 

이청준은 현재까지 꾸준히 많은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다. 퇴원보 다 15년의 간극이 있는 조만근 초기작에 속한다. 그의 문체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나, 두 작품을 비교함으로써 그의 문체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이청준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인 퇴원에서부터 인물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술하는 ‘보여주기’방식을 사용했다. 인 물의 생각과 세계의 생각의 부딪힘을 표현할 때 지나치게 인물의 생각에 치우치지 않게 서술했다.

이에 대해 정과리는, 세계가 미리 주어지고 확정된 것으로서 그 속의 사람들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의도들의 구성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는 인간의 손으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괴물로 보이지만, 실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이청준이 인물과 세계의 관계를 표현한 방법을 설명해준다. 세 계의 보편적인 생각이 개인과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 역시 개개인의 생각으로 구성된 것이다. 개인의 모두 다른 생각들이 모여 세계를 이룬다.

이청준이 완전한 관찰자 입장을 취하지 않는 서술에서 오는 효과는, 생각의 차이에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퇴원에서는 특정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문체 기법이 주요했으나, 그 이후 작품에서는 이청준은 질문을 던진다. 어 느 쪽이 옳다고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독 자에게 생각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문체의 묘는 이런 대립되는 생각의 균형을 맞추는 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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