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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흐름에 따른 <파우스트>의 변화

 

1. 괴테의 파우스트 이전의 파우스트 이야기

(1) 설 화 파우스트

-가장 오래된 파우스트 민담본은 1587년 판으로, 솨이블레(Scheible)는 이를 《요하네스 파우스트 박사》라는 제목으로 재판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파우스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처럼 되기를 바란 파우스트는 비술에 뛰어들었지만 만족하지 못했고, 악마를 찾아가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을 강요했다. 악 마는 파우스트가 죽고나면 대가를 한꺼번에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파우스트는 화가 나서 악마를 쫓지만 악마의 시중에 익숙해져 있던 나머지 다시 돌아오게 한다. 악마는 자신을 메피스토펠레스라고 소개하며,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다. 메피스토는 여러 가지 방탕한 생활을 제공한다. 파 우스트는 이에 싫증나고, 이승이 아닌 다른 세계에 관한 경험을 하기를 원했다. 파우 스트는 메피스토를 따라 지옥과 천국을 경험하고, 교황을 농락하며 술탄의 하렘으로 갔다가 황제 샤를 5세에게 마술사의 자격으로 초대받는다. 여기서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와 약속한 24년이 되어 육체를 메피스토에게 빼앗기고, 그 의 가족은 사라지며 바그너는 그의 책을 물려받는다.

 

(2) 말로우의 파우스트

이 이야기는 말로우(Marlowe)가 파우스트는 위와 같은 설화의 이야기를 희곡으로 옮기기 전에도 있었다. 튀빙겐에서 1587년에 발간된 판과, 1599년 함부르크에서 발간된 비드만 판이 있는데, 후자에서는 사상의 깊이보다 잔인한 사건을 더욱 강조했다. 이 비드만 판은 훗날 번역본의 기초가 되었다. 이 중,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에서 쓰인 1728년 판은 파우스트가 무대에서 공공연히 신을 저버린다고 고소했던 베를린의 목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파우스트는 17세기에 무대에서 상연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또한 인형극으로도 존재했었다. 바그너의 이야기로도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 러나 바그너의 이야기는 새로운 내용은 없다.

말로우의 파우스트에서는 파우스트의 고민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양심과 유혹 사이의 투쟁을 보여주었다. 악마와 천사가 서로 경쟁해서 그의 혼을 쟁탈하였으며, 마침내 24년간의 향락과 지배의 대가로 악마가 승리한다.

괴테 이전의 이야기에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와 계약을 하고 쾌락과 명예 등을 얻는다. 파 우스트는 원하던 모든 것을 메피스토를 통해 얻지만 계약에 따라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특히 파우스트가 쾌락을 대하는 관점에서 괴테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말로우의 희곡까지 파우스트는 쾌락을 즐긴다. 그러다가 갖가지 쾌락을 모두 접하기 때문에 쾌락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싫증난 것이다. 또한 호기심과 명예에 대한 욕구도 채운다. 역시 이것을 추구할 때도 그는 이를 즐긴다. 교황을 놀리는가하면, 술탄이 자신을 모하메드라고 믿게 한다. 또 가장 아름다운 헬레네와도 함께 지낸다. 그는 오직 계약의 만료기간을 두려워했을 뿐, 메 피스토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즐겼다. 그랬던 파우스트의 끔찍한 결말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레싱과 괴테의 파우스트

-이전 의 이야기와 다르게 파우스트에 접근한 사람은 레싱이다. 레싱은 파우스트의 인격과 운명을 긍정적으로 관찰했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처음으로 구제된다. 레싱의 파우스트는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 이념이 괴테에게 이어진다.

레싱 이전의 파우스트 비극에서는 파우스트의 지식욕, 충동, 피 의 맹약 등이 필연적인 멸망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괴테는 파우스트가 이러한 멸망의 운명을 의식하고도 악마에게 혼을 팔았다는 사실은 불굴의 자기 향상을 꾀하는 정신으로 본다. 이러한 파우스트의 정신은 강한 긍정적인 면이며 구원의 요소인 선()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천 상의 서곡의 <내기>에서 나온 구원의 예상은 레싱의 경우에도 있었다.

지식욕은 곧 우주욕이며, 파우스트적 인간은 우주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유혹에 빠지며 죄를 짓지만, 높 이 향상하고자 하는 정신만은 잃지 않는다. 이 정신을 괴테는 <>으 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피셔 K. Fischer는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으로 보고 숭고하다고 하였다. 파우스트의 구제는 괴테의 작품 첫머리, 신과 악마의 <내기>에서도 언급된다. 여기서 신은 이미 파우스트의 발전을 예견하고 시련을 줄 것을 허락했다. 이는 레싱의 경우에도 너 는 이기지 못하리라는 하늘로부터의 말이 서곡의 테마였다.

 

3. 파 우스트의 행보에 대한 관점의 변화

레싱과 괴테가 파우스트의 행동에 대해 관점을 바꾼 이유는 시대와 직결된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집필한 시대의 사상의 흐름은 르네상스를 넘어, 계몽주의 사상에서 낭만주의 이전이다. 질풍노도의 문학은 18세기의 1760, 1770년대 독일에서 신분제도와 봉건적 질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데 노력을 기울였고, 18세기를 포괄하는 개념인 계몽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당시 제한된 범위나마 경제 정치적 상승기회를 포착하고 있는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해방과 그에 상응하는 문학 기능을 강조하였다. 질풍노도에서는 종교적 전통에 의한 후견이 반신화적 이성으로 조롱을 받는다.

레싱의 파우스트는 그 이전 작품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 레싱의 파우스트 사상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위에서 밝히고 있는 파우스트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서 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의 노력에 대해 토마스 만은 <자 기의 몸을 생에 바쳐서 인간의 환희와 고난을 한 몸에 받아들이고 인류에게 영광을 더하려는 노력은 무한의 것>이 라고 하였으며 계속하여 <그것이 비록 거인적이며 불손한 죄의 시초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악마에게보다는 더 많이 신적인 것에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계몽사상의 흐름에 바탕을 두고, 노력은 지혜와 교양을 통한 이성으로 다가가는 필수 요소임을 말한다. , 계몽사상에서 바라보는 노력에 대한 관점과 같은 의미로 괴테는 파우스트의 행동을 해석한다.

이처럼 레싱의『단편 파우스트』를 계승하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으로 국한하기는 어렵다. 괴테는 에커만(Eckermann)에게 그의 파우스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악마가 내기에서 지는 것, 고난에 찬 미혹으로부터 방황 속에서도 쉬지 않고 향상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이 것도 확실히 유효하고 많은 것을 해명하는 훌륭한 사상이긴 하지만, 이것이 이념은 아니야.

 

위 괴테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초점은 ‘노력하는 인간의 구원’에 있지만 그것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 이 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다른 매체로,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어떻게 조명되는지 살펴보면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4. 다른 매체의 파우스트

과거 괴테가 집필하던 시기에 지배적인 계몽사상이 바탕이 되어, 괴테의『파우스트』는 ‘노력하는 인간의 구원’의 표상으로 해석되었다. 괴테는 선한 인간이 고난과 미혹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찾아 향상하려는 의욕이 감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본성의 날카로운 청각이 성스러운 말을 접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행동으로 즉시 구현할 수 있다고 본다. 현 대는 괴테의 시대보다 훨씬 절박하고 심각한 처지에 있다. 더 많은 유혹과,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고, 미혹이 도처에 놓여있다. 과거보다 더욱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향해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괴테가 보았던 파우스트의 인간상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괴테 이후, 파우스트는 새롭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과거 인형극 등의 공연은 말로우의 희곡을 바탕으로 했으나, 괴테 이후에는 그의 파우스트가 바탕이 되고 있다. 오페라, 뮤지컬, 영 화 등으로 괴테의 파우스트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 매체들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제 1, 그레트헨 비극이다.

1부에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최고의 이상과 인식, 지고의 향락에 대한 욕망 사이를 방황하게 유혹한다. 메피스토가 그레트헨을 끌어들인 이유는 파우스트의 노력을 육감적이고 향락적인 세계로 향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메피스토가 준비한 나체의 여인상과 마녀의 시약은 그런 목적 하에 준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파우스트는 이 메피스토의 수단에 걸려들어 그레트헨을 욕정의 대상으로 대한다. 그러나「감옥」의 장면에서 그는 충격과 수치감을 절실히 느낀다. 메피스토펠레 스는 파우스트로 하여금 정욕 속에 얽혀들어 그 앞에 스스로 굴복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자 신의 활동에 대한 충동과 드높은 곳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마비시키는 일에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1859,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는 파우스트 제 1부를 바탕으로 오페라「파우스트」를 작곡했다. 2부 는 작품의 구성도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서, 비교적 플롯이 통일되어있고 스토리 중심적인 1부 가 오페라로 만들기 더 수월함은 당연하다. 이 점이 당시 독일에서 오페라「파우스트」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뮤지컬과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역시 제 1부만을 다루고 있다.

5. 왜 제 1부인가

그레트헨에 관한 이야기는 파우스트 전설과는 관계가 없다. 괴 테가 창작한 부분이다. 이는 1775년에 발표한『초고 파우스트 Urfaust』 를 통해 알려졌다. 이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한 직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1부는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하려던 파우스트가 지식의 무력함에 실망을 하고 악마의 도움으로 이 세상의 모든 관능적인 향락을 맛보고 세계의 온갖 가능사를 체험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레트헨 비극으로 끝이 나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제 1부의 내용이다.

오페라 파우스트에서는 제 1부의 전반에 나타난 파우스트가 악마를 불러내게 된 동기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천상의 서곡」장면이 빠져 인간의 부단한 노력에 의한 구원과 같은 주제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제 1부만을 공연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1부만으로는 그러한 사상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어려운데다가 1부의 이야기 흐름을 분산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때 문에 이야기는 자연스레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 이야기로 초점이 맞춰진다. 오페라 파우스트뿐만 아니라, 영화나 뮤지컬 역시 같은 부분을 다루었다. 그렇다면 왜 그레트헨 비극만을 다룬 것일까.

그레트헨 비극을 다룬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먼 저 이야기 중심의 구성이다. 『파우스트』전체를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지식의 무력함에 실망을 하고 악마의 도움을 받으려는 파우스트, 두 번째는 그레트헨 비극, 세 번째는 미를 추구하여 일어난 헬레네 비극, 네 번째에서 파우스트는 인류를 위해 창조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그 중 그레트헨 비극이 보는 이와 더욱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것, 어느 정도 결말을 짓고 있는 것도 이 부분으로 정한 원인이 된다. 물론 공연하기 수월한 점이나 상업성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괴테가 집필하던 시대 이전에는 예술, 문학, 철학 등등에 어느 정도 지배적인 사상이 있었다. 예를 들면 괴테가 집필하던 시기에는 계몽사상이 독일 문학의 큰 조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사상의 흐름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또 한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다원화되었다. 어느 특정한 사상, 경향이 예술이나 철학, 사상을 지배한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 바라보는 파우스트의 제 2부 가 괴테의 당시 사상을 담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과 공감되기 어렵다. 그 사상의 현대에 대한 필요성은 별개의 질문이다. 다원화된 만큼 당 시대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 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이들의 공통적인 감정에 집중을 하게 되고, 만고의 주제인 사랑에 조명이 맞추어진 것이다. 이는 상업성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상업성만이 그 전제라고 보기도 어렵다. 파우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많은 부분 중 하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기에 어쩌면 그것이 유명해져서 뮤지컬, 오페라, 영화 등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2000년에 개봉한 영화 <파 우스트>는 악마와의 내기만을 차용하여 아내의 복수를 한다는 삼류 고어물이다.『꿈 꾸는 책들의 도시』라는 소설에서는 ‘호문클로스’가 등장하고 메피스토펠레스의 단어 순서를 바꾼 악마적인 인물의 이름으로 설정된다. 각기 고전의 차용하고 싶은 점을 차용한다.

현대에 있어 파우스트를 비롯한 고전이 시사하는 점은 많다. 그러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는 사람도, 오페라나 영화를 보는 사람도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있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 조명된다. 고전의 묘미는 과거와 현재, 나와 타인 간의 생각의 차이에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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