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4

부서진 유리컵에서 진화한 인간이 말했다. 기다림은 헛된 것이다, 씻어내고 씻어내다, 그 끝에 오롯이 부서지고 말 뿐이다. 어그러진 구두 주름에서 태어난 사람이 말했다. 견딤은 헛된 것이다, 구겨지고 구겨지다, 가죽 한 장으로 아스라이 남겨질 뿐이다. 우산살을 척추로 삼은 인간이 말했다. 가냘픈 친구들일세, 비에 씻겨보게, 모래에 쓸려보게, 바람에 쓰러져보게, 남은 천이 있다면 두르고 거리를 걸어보게, 제왕처럼 코를 높이 들게, 부러지지 않을 듯 버텨보게, 그래도 심란할 때는 손끝에 닿는 모든 것에 이마를 대어보게,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2013.10.15

새벽 5시. 말하다 혀를 씹듯, 자다가 꿈을 씹었다. 꿈에서 바보 역을 맡았던 부분만 기억에 남아, 여전히 누워있다. 잠시 후 매일 벌어지는 일을 당기지 않기 위해, 여전히 누워있다. 똑같은 늑장으로 잃어본 사랑과 얻은 후회를 세면서 잠을 청하느라, 여전히 누워있다. 멀리서 첫 차 달리는 소리에도 여전히 누워있다. 꿈에서 너를 보았으니 안심이다.



2013.10.17 - 마름

밭에서 자란 천사가 감자에 질린 나머지, 선착장으로 떠났다. 마침 바다에서 막 돌아온 어선 한 척이 있었다. 어부가 내리자마자 천사는 물었다. 여기엔 어떤 감자가 납니까. 어부가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일 년에 한 번씩 꼭 너같은 감자가 있더라.



2013.10.18

밤은 버려진 하루를 개어 상자에 넣는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에 맞추어 내다놓는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새벽에 가져간다. 맞은편 횡단보도에 선 너의 표정에, 다독이려 다가선 너의 어깨에 오래전 하루가 쓰여있다. 새 일기장을 준비한다. 하루씩 담을 수 있도록, 너에게 줄 수 있도록.



2013.10.19

백지는 말한다. 당신이 깨어있음을 열 자 이내로 증명하시오. 술이나 차, 노래에 취하지 않았으며 밥이나 책으로 배부르지 않았음을 증명하시오. 펜이 온전히 너의 발자국을 겨누고 있는지 확인한 후, 다음의 물음에 답하시오. 당신은 왜 여기 서 있는가. 백지는 묻는다.



2013.10.22

잎은 해를 느리게 사랑한다.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참새가 앉았다 일어나기만 해도 휘둘리고, 조금만 추워도 쉽게 이슬을 흘린다. 주저하며 바라본다. 망설이며 닮아간다. 노랗게 물든 모습을 이리저리 강물에 비추어 본다. 잎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점점 높아져 해가 멀어져가기 시작할 때, 잎은 몸을 한껏 뻗어 해를 향한다. 닿을 듯하다. 어쩌면 행인의 걸음을 따라, 어쩌면 저 바람을 타고, 어쩌면 저 구름에 실려, 파란 하늘 한복판 어디쯤 꽂힐 수 있을 것만 같다. 조금 더 몸을 당긴다. 팽팽해진 잎의 마른 잎맥이 툭, 끊어진다. 아주 잠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머문다. 해와 잎이, 아주 잠시, 손가락을 맞댄다. 볕이 머문다. 그리고 낙엽, 잎은 떨어진다. 바닥에 부딪는 소리, 다음 삶에서도 해를, 말을 끝내지 못한다. 바람 없는 날, 잎이 흔들리는 건 고백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2013.11.23

바람 불지 않아도 잎 떨어졌을까. 눈 감지 않아도 어제 지났을까.



2013.12.06

아마도 그녀만 아는 한 가지와 그녀만 모르는 한 가지가 필요할 것이네. 밤이 깊을수록 홍차는 오래 머무른다는 것. 해가 지기 직전, 골목의 그림자마다 그녀의 이름을 써두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안다면 그녀는 홍차를 마시지 않을 것이고, 두 가지를 모두 모른다면 골목을 지날 수 없겠지. 자네는 어디서 홍차를 끓일 텐가. 아마도 그녀만 아는 한 가지와 그녀만 모르는 한 가지가 필요할 것이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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