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화가


 소년은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주 심심한 사람이 되었다. 방에 이젤을 세우고 화구를 가지런히 차려놓고서 매일 그렸다. 덕분에 학교와 집을 오갈 뿐이었다. 친구들과 학교에서 자주 어울리기는 했지만 하굣길에 어딘가 들르거나 하지 않았다. 대체로 환할 때 집에 와서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캔버스 앞에 앉아 수 시간을 보냈다.


 그리는 건 하루에 한 줄 뿐이었다. 그 이상 그리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지만 그리는 양은 늘지 않고 오로지 한 줄 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대학에 진학해 혼자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채색은커녕 밑그림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캔버스를 챙겨갔다. 좁은 단칸방에서 생활하면서도 캔버스를 방 중앙에 세워 놓았다. 옷을 갈아입거나 자다가 툭툭 건드려 쓰러뜨리는 일도 잦았다. 그럴 때마다 다시 세워놓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몸이 그런 방 배치에 적응했다.


 시험공부를 하는 날이나, 술을 마신 날에도 그림에 선을 하나씩 보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에도, 싸운 날에도, 떠나보내는 날에도 감정을 듬뿍 담아 선을 하나 그었다. 직장에서 연수를 간 곳에서도, 장례를 치르며 밤을 새우는 곳에서도,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간 곳에서도 캔버스를 잊지 않고 챙겨갔다.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 중에서는 더러 이해하지 못하는 이도 없지 않았으나, 주변에 크게 폐를 끼치는 행동이 아니라 그다지 걱정하거나 꺼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꿈은 소중한 것이라며 이왕 가져온 김에 더 그려보라는 둥, 격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모든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하루에 단 하나의 선을 그었다.


 아기가 생길 때쯤 비로소 채색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기를 키우는 핑계로 직장에서 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그는 더 좋았다. 아기 물품을 두는 방을 화실로 겸해서 쓰기로 했다. 아기를 재우고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 캔버스 앞에서 보냈다. 하루에 한 가지 색으로 딱 한 번만 붓질을 했다. 색을 배합하거나 칠할 곳을 보는 동안 아내가 말을 걸곤 했다. 그는 그림에 집중한다는 말로 아내를 무시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 또한 그 시간을 좋아했다. 차를 끓여오기도 하고 가계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고 친지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곧잘 듣고 제대로 대답했다. 단 시선만은 변함없이 캔버스를 보았다. 아내는 그 점이 서운했으나 대꾸가 불성실하지는 않았기에 자신이 양보해야 하는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는 아이를 재우고 화실로 들어왔다. 아내도 그 날은 신경 쓰느라 힘이 들었는지 같이 잠들었다. 간간이 화실 창밖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가끔 침묵이 왔다. 무엇도 들리지 않는 찰나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붓을 들어 색을 묻혔다. 캔버스의 마지막 빈 곳을 채워넣었다. 그는 의자를 약간 뒤로 옮겨 다시 앉았다.


 자화상이었다. 그는 아직 붓을 들고 있었지만 그림은 완성되었다. 매일 선이나 색을 그려넣기 전에 그림을 보다가 완성된 그림을 보려니 어색해서 붓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그림을 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붓이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덜덜 떨리더니 이내 손아귀에서 붓이 부러졌다. 그는 차마 일어나지 못한 채 왼손으로 무릎을 움켜쥐었다.


 그림이 엉망이었다. 비율이 제멋대로였고 색은 지나치게 다양했다. 격분한 날의 콧날과 우울한 날의 눈매가 맞닿았다. 이십 대의 강렬한 색과 삼십 대의 낭만적인 색이 부딪히다가 사십 대의 장중한 색에 묻히고 있었다. 그리면서도 모르진 않았다. 나름 색을 조정하며 그렸고, 덧칠도 해가며 바로잡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볼품없는 완성작이다. 하루를 응축해서 그린답시고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다. 완고한 하루가 그림을 망쳤다. 삼십 년이 넘게 걸린 회심의 작품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삼십 년이 칠해져 있을 뿐이다. 그는 부러진 붓을 거꾸로 잡았다. 날카로운 단면이 화폭을 향했다. 그는 붓을 치켜들었다.


 - 아빠, 다 그렸어?


 아이가 문가에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치켜든 팔을 내렸다.


 - 응. 다 그렸어.

 - 그럼 잘 거야?


 그는 붓을 놓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아직 졸린 지, 어두운 방에서 밝은 화실로 들어와 눈이 부신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만한 나이 때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었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비슷하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화실을 돌아봤다. 환한 방 중앙에 제멋대로인 그림이 놓여있었다. 바닥에는 부러진 붓이 흐트러져 있고 의자가 그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 아니, 아직. 얼른 자.


 그는 붓을 주웠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림을 이젤에서 내려 창문 밑에 기대어 놓았다. 이젤에 새 캔버스를 올렸다. 의자를 당겼다. 앉아서 손에 목탄을 가만히 쥐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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