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5.19
비를 맞자. 비가 문앞을 막아서도 나가자. 비가 옷깃을 잡아당겨도 우산을 쓰지 말자. 반송될 곳 없는 편지처럼 길을 잃자. 성냥개비 탑처럼 와르르 무너지자. 비를 술처럼 마시고 눈처럼 녹아버리자. 축축한 흙을 몽땅 헤집고, 발자국을 여러 겹으로 어지럽게 포개자. 넘어지자, 젖어버리자, 흙과 범벅이 되자. 그래도 아무래도 그곳엔, 갈 수가 없다.
2013.5.26
길에서 만난 당신은 어김없이 땅을 보며 걷고 있습니다. 나도 그 땅을 보고 기분의 지도를 펼칩니다. 당신이 정확히 어디쯤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슬픈 신호등과 어떤 안타까운 거리 사이에서 아직 아픈 골목을 돌아 흔들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으로 나도 따라 걷습니다. 바닥에 당신의 지도를 펼치고 당신의 기분을 따라 걷습니다. 당신이 어디서 견디고 있을지, 한숨을 뻗어 천천히 더듬어 갑니다.
2013.6.2
해가 지고 모든 그림자가 우수수 떨어졌어. 너무 밝은 가로등은 자기 그림자를 찾지 못한 나머지, 옆에 있는 가로수가 가로챘다고 생각했어. 심통 난 가로등은 밝기를 줄였어. 가로수가 가진 그림자가 줄어들었지. 가로등은 제 앞만 비출 정도로 밝기를 더 줄였어. 그림자는 가로수 뿌리 근처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지. 가로등은 불을 껐어. 가로수 앞에 있던 그림자는 이제 밤과 뒤섞여 알아볼 수가 없었지. 그때쯤엔 가로등도 밤에 덮였어. 가로수와 가로등을 구분할 수 없었지.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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