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4km 저편의 옆집] 에 있는 모든 사진은 직접 찍었습니다.-

 모든 모험이 그렇듯, 내 모험도 일상의 중단에서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 혹은 절망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밤과 달처럼 그저 때가 왔을 뿐이었다. 모은 돈이 있었고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장사를 할 수도 있었고 학비를 조달할 수도 있었고 더 큰 방을 구할 수도 있었고 책, 최신 기기를 살 수도 있었고 맛있는 음식점을 돌아다니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여차하면 그냥 저금해버리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을 팔아 만든 돈인만큼, 시간이 없었다.
 책을 꺼내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새로운 음식을 먹는 시간은 쉽게 할애할 수 있지만, 국경을 넘다니. 가난한 나에겐 무리라고 정해놓은지 오래였다. 시대가 좋아져서 국경 밖의 소식과 말과 문화를 접할 수 있으니 내 몸을 직접 해외로 옮기는 건 사치라고 여겼다. 더군다나 통장에 비행기 값 이상 들어있던 적이 없었다. 월세,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등록금을 제하고, 먹는 양을 줄이고, 고생을 미래에 투자했다. 여행이란 관광이자 쉼, 놀이일 뿐이었다. 그런 내 통장에 1년 동안 일해 모은 돈이 있었다.
 첫번째 질문. 인생이란 짧은 시간에서 여행이 차지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여행이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사람에게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일상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두번째 질문. 그럼 내 인생에서 이런 시간이 다시 올까? 세 달 넘게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돈은 벌 수 있겠지만 그럴 시간이 올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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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멀리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놀아도 좋지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준비를 시작한 지 3주만에 영국으로 가방을 싸서 나갔다. 비행기, 국외, 영어 등 필요한 경험은 다 합쳐도 0에 가까웠는데 고른 곳은 영국의 Torquay라는 시골. 런던까지 비행기로 걸리는 시간은 13시간, 거기서 5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남서부의 작은 마을. 일본에서 경유하느라 1박하고,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또 타야했다. 새로운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 한국과 영국의 차이를 구별할 틈도 없었다.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잠자리, 먹거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자고, 전라도의 김치를 먹고, 한국인만을 만나온 나에게 영국 변두리라니. 여기에 김치는커녕 나물도 없다. 영국하면 유럽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음식은 Fish&Chips 인데, 우리나라로 따지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정도의 인지도다. 집에서도 흔히 만들고 물론 음식점에서도 파는 대중적인 음식.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이 포함되어 있는 하숙집이었으니까 끼니를 챙겨 먹을 수만 있다면 만족이었다.
 해외 생활을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집에 묵느냐가 음식을 비롯한 생활환경 전체를 결정한다. 학교도, 직장도 사람은 미리 고르기 힘들다. 재물운, 애정운도 좋지만 역시 사람운 좋은 인생이 제일이다. 좋은 하숙집 주인을 만나서 이 나라의 가정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날씨는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언제나 하늘엔 큼지막한 구름이 성큼성큼 걸어다닌다. 아무리 햇볕이 따뜻해도 비는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대신, 안 가지고 다니는 쪽을 택했다. 분명 근대의 영국 신사 이미지는 높은 중절모와 긴 우산이었지만, 이제는 높은 구두와 긴 바람막이일까. 하늘은 높고, 옛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니 고적하다. 편안한 곳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그곳에서 나오기 전엔 체감하기 힘들다. 구름이 모습을 바꿀 때, 나뭇가지에 잎이 흔들릴 때, 거리에 새들이 뛰어다닐 때, 강아지가 제 목을 긁적일 때, 자연은 편안하다고 말하며 우리를 다독인다. 




 아이들은 놀고, 청년들은 술을 마신다. 국적을 불문하고 볼 수 있는 거리의 광경이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사람들의 역사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영국의 집들은 임의로 무너뜨릴 수 없다. 법률상으로 거리와 맞닿은 건물의 면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개축공사를 많이 한다. 덕분에 거리를 보면 과거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났던 장소에 가볼 수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마주쳤던 지점을 볼 수 있다. 하늘과 땅과 건물이 변함없는 약속을 했던 바로 그 장소, 아직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면 모든 시작이었던 그 거리. 나도 이 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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