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사항.

- 두 작품 모두 교단 입장에서 문제작이었던 작품이다.
- 난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1. 최후의 유혹



먼저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 최후의 유혹을 소개한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얼마전에 열린책들에서 그의 전집을 재판해서 내놓았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비롯한 소설과 여행기, 자서전 어느 하나만 읽어도 문장의 색깔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화려하고 장대하고 유려한 고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접근과 문체. 초반부에서 펼쳐지는 장엄함에 질려버릴지도 모른다. 
(마치 '반지의 제왕'처럼, 하지만 배경은 현실.)

어느 영국의 평론가(이러면 신빙성 없지만)의 말처럼 그가 러시아어로 쓰고 이름이 '카잔차스키'였다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대문호로 전세계적으로 주목받았을 거라는 말에 동감한다.

작품을 하나 더 읽을 때마다 동감한다.



- 최후의 유혹

아마 가톨릭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 아주 약간씩 다른 제목으로 자주 출간되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마지막 유혹' 등등 
뜻은 같지만 제목이 다르기에 검색도 쉽지 않지만 내용은 같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적이 있는데 아마 하(下)권의 마지막 세 장(章)만 다룰 것같다.

이 작품은 금서로 지정되었다가 1955년에서야 그리스에서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예수가 목수로 살아가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고뇌하고 생활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신을 만나고 악마를 만나는 과정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과정, 그리고 유혹이 
그가 가진 독특한 비유와 거대한 묘사로 그려진다.

두 권이다.




2. 예수복음



- 주제 사라마구

생략한다.



- 예수복음

최근(2010) 타계 전 출간해서 또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작품 '카인'과는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참 예전의 작품이다. (1991)


참고로
국내 대표작 '눈 먼 자들의 도시'는 1995.

예수가 태어나기 전인
요셉과 마리아의 시절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낳고 예수가 자라서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한 권이다.







3. 공통점

신성모독으로 문제가 되었던 논점은,
두 이야기에서 예수가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종교적 파장은 시대도 시대고, 내용상으로도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 더 컸다.

두 작품 모두 '인물'을 성경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앞서 말했듯 예수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주변 사도들, 특히 유다에 대한 묘사가 다르다.
성경의 1차 해석에 충실한 것이 나츠메 소세키의 '고백'이라면
이 두 작품에서는 작가 나름의 상황을 만들어 인물을 다면화시켰다.

즉 초점을
- 예수
- 예수의 고난과 설파 (신을 만나기 전/후) : 겪는 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
- 사도 : 만남, 그들의 성격 묘사, 비중
- 기적
- 십자가에 매달리는 날

에 두고 읽으면 재밌다.
성경과 다른 해석이지만
두 작품 간에도 차이가 있다.





4. 차이점


이하, 스포일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이런 건 확실하게 짚어드려야지.
미리 알림, 내용 언급, 스포일링, 네타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이 작품 이해를 방해할 경우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I'm not guilty. 잘 못되면 조상탓.

간단한 리뷰는 이쪽



 
'최후의 유혹'이 더욱 빛나는 부분은 마지막 3개 장이다.
아... 스포일링 경고를 하긴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다.
인터넷 검색하면 어디든지 나오니 주의하시도록.



가. 사람의 아들

'최후의 유혹'과 '예수복음'은 모두 예수를 인간으로 봤다.
하지만 인간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이는 예수와 신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최후의 유혹'의 예수는 신과 대화를 마치고 깨달음을 얻어 복음을 설파하고 기적을 일으킨다.
즉 사람이던 예수가 고난과 역경, 주저 끝에 신의 뜻을 알게 되고 
자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각을 얻는다. 
예수는 고뇌하나 성스럽다.

그러나 '예수복음'의 예수는 다르다. 이 예수는 자신에게 회의적이다. 신 앞에서도 회의적이다.
(염세와 다른 의미다.)
그는 왜 자신이어야만 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굳이 꼭 자신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신과, 악마와 얘기한다.

특히 예수가 신과 대화하는 부분에서 두 작품의 성격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막도 그렇지만 그 후에도.



나. 사도

두 작품 모두 사도들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래도 '최후의 유혹'에서는 성실하게 인물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직업과 성격, 심리를 그리지만
'예수복음'에서는 대충이라고 할 정도로 넘어가버린다.
특히 유다의 배신에 대한 두 작품의 입장이 같은데,
다른 점은 유다의 성격과 행동이다.

'최후의 유혹'에서는 유다와 사도가 예수의 옆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는 반면,
'예수복음'에서는 후반부에 스르륵 언급하고 넘어가는 정도다.

이 얘기를 하려면 두 작품이 전체적으로 어디에 비중을 두었는가를 말해야 한다.



다. 시작과 끝

'최후의 유혹'의 시작은 목수 예수다.
예수는 이미 목수로 일하고 있으며 생활고와 직업고에 시달리고 있다. 
못해먹겠네, 때려쳐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

'예수복음'의 시작은 요셉과 마리아다.
요셉이 마리아를 어떻게 만나서 예수가 태어날 땐 이러쿵저러쿵
말많은 주제 사라마구의 입담이 쏟아진다.

두 작품의 첫 장만 비교해봐도 그 차이는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물론 이 일부로 전체를 판단하긴 힘들다. 
그래도 신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어떤 태도인지 알 수 있다.

'최후의 유혹'은 예수의 일대기이며, 그가 겪는 고뇌를 그린다.
그 고뇌는 그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겪는 고뇌다.
처음부터 신의 인간이었고 알고 있었다면 그런 고난은 없었을 것이며
깨달음 또한 없었을 것이고, 유혹 또한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작품에서는 예수의 하루하루를 세밀한 필체로 꼼꼼하게,
하지만 기존과는 전혀 다른 비유와 배경과 묘사로 그려낸다.


'예수복음'에서 예수가 마음 먹고 설파하는 분량은 전체의 1/7에 지나지 않는다.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부터 신과 악마와 예수의 대화까지가 나머지 분량이다.
즉 제목은 예수복음이지만 예수의 가르침 해설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인간과 신은 친근하면서도 세대차이 나는 모녀지간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소소한 인간사에 예수는 무슨 생각으로 왜 십자가에 매달렸는지 보여준다.
두 작품의 색깔은 극명하게 다르다.



라. 차이를 간단히 말한다면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와 인간의 구도는 기존 성경에서 그려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고전주의 화풍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내용에서 파격을 보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렘브란트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예수복음'은 인간의 삐딱하지만 친근함을 보인다.
인상주의 혹은 반 고흐에 비유할 수 있다.

성경의 예수는 신의 아들이며 기적의 메시아다.
그러나 두 작품의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다.
'최후의 유혹'은 예수를 고뇌에 찬 성자인 사람의 아들로
'예수복음'은 소탈하게 제 할일을 하는 사람의 아들로 보여준다.





5. 재미


두 작품의 색깔이 너무 달라서 어느 쪽이 좋다고 말하기 힘들다.
초점이 다른 것이다.

'최후의 유혹'은 독특한 비유나 끈기있고 세심하게 표현하는 묘사들이 압권이다.
이를 지겹게 생각한다면 결코 다 읽을 수 없다. 
마지막 3개의 장이 압권이라고, 예수의 일대기 정도는 알고 있다고 건너뛰면서 읽는다면
참맛을 알 수 없을 뿐더러, 마지막 장들이 결코 인상깊지 않다.

'예수복음'은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대화 스타일이 잘 살아있다.
묘사나 상황보다는 천사와 신과 악마와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다.
대부분이 대화로 진행되며 특별한 반전보다 깊은 전개가 있다.
당연히 이 책의 분량도 만만치 않지만 사라마구가 나름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지 않은 것 같다.

신자는 신자대로,
무신론자는 무신론자대로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읽으리라 기대한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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