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보다 넓은 곳으로, 보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행위다. 그래서 집을 나서는 순간 보이는 모든 것, 거대한 구름의 지붕을 떠받치는 나무와 전봇대부터 행인이 흘리는 아이스크림 방울까지 여행이 된다. 하지만 관광은 다르다. 여행은 선을 긋지만, 관광은 점을 찍는다. 여행은 가서 가져오지만, 관광은 가서 내려놓고 온다. 그래서 여행은 앉아서도 할 수 있지만, 관광은 가지 않으면 조바심이 난다. 마음을 적시려면 여행을, 말리려면 관광을 가야한다.

 


 눈을 떴다. 생소함이 창문으로 밀려 들어와 방문 틈으로 흘러 나갔고 침대 밑, 옷장 틈에 끼었다. 내 발로 들어와 친구집처럼 편안하게 잠들었으면서 눈을 떴을 땐 납치당한 사람처럼 낯설어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집을 나서면 두 가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와 누군가가 만나 무슨 일인가 벌어지는 마을의 풍경.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가는 사막의 풍경. 문을 열었을 때 만난 것은 마을의 풍경이었다. 집이 있고, 가꾸어진 정원이 있고, 들고 나는 도로가 있었다. 정원은 집의 뒤쪽인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도로는 집의 앞쪽인 가장 열려있는 곳에 있다. 이 셋은 어디에나 있으나, 이곳은 다르다. 률 상, 도로에 접한 면은 바꿀 수가 없다. 그 외의 공사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데 가령 뒤쪽의 정원은 자유롭게 좁히거나 없앨 수 있다.
 영국의 집은 직장인처럼 똑같은 얼굴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손님은 집에 대해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손님은 문을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집을 본다. 손님은 신발장과 차탁자와 소파에 맺혀있는, 밖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소함과 마주한다. 집 앞은 외면이고, 집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라면, 집 뒤의 정원은 사는 사람의 여가를 보여준다. 얼마나 마음에 여유가 있는가. 거실이나 집 내부가 아닌 정원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정원은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가꾸거나 방치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자유와 여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런던처럼 땅값이 비싼 곳에서도 많은 집이 정원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남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는 내면을 집 뒤에 있는 정원에서 가꾼다. 그들의 정원을 보고서야 우리는 그들은 봤다고, 안다고, 든든한 속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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