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p 에서 시작하지만 내용을 더 잘 느끼기 위해 다음 장의 서두를 기록함.
※ 원문의 편집 상태 그대로 옮겼음.




그가, 18호 남자애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 애가 일어서더니,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누가 미처 무슨 소리를
  내기도 전에 길을 가로질렀다.
마치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같았다, 기회를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출발대의 단거리 선수처럼 현관 계단에서 튀어 나가, 내가 누군지
  보려고 몸을 돌린 순간 벌써 거기 도착했다.
그 애가 거기 도착하자 상황은 끝났고, 너무 갑작스러운 사고여서
  나는 마치 눈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하얘졌고, 유령처럼, 옛날 뉴스 장면처럼 희미해지고 얼
  룩이 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대체 무슨 일인지 믿
  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앉아서, 여름의 마지막 날 따가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는
  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이 안 됐다.
그가, 18호에 사는 남자애가 길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았고, 이
  해하려 해 보았다.

그 사고를 본 기억이, 그 순간 자체가 기억이 안 난다, 이상하게 사
  소한 것들만, 가운데 부분은 보이지 않고 그 주변에서 일어난 지
  엽적인 이미지, 사소한 일들만 기억이 난다.
내 옆에 있던 여자애가 맥주 캔을 떨어뜨리고, 충격파에 맞은 것처
  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기억이 난다.
바닥에 떨어지던 맥주 캔, 풀밭에 부딪는 순간 무게 때문에 찌그러
  지던 모양이, 폭풍에 스러지는 전신주처럼 기우뚱하다가 다시 똑
  바로 서던 모양이 기억난다.
캔 위로 맥주 거품이 뿜어져 나오던 모양은 느린 영상으로 기억해
  낼 수가 있는데, 풀밭에 쫙 쏟아지기 전에, 내 허벅지 위로 튀기
  전에, 순간적으로 빛 속에서 연기처럼 솟아올랐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진짜 보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공중에 흩뿌려져 반짝이던 맥주 거품.
액체가 흙 속으로 스며들자 몸을 곧게 펴던 풀잎들, 내 치마에 떨어
  졌다가 태양빛에 움츠러들고 시들고 말라 버렸던 축축한 방울들.
그 밝은 햇빛.

높은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담요를 터는 여자가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바비큐를 하면서 고기가 익었나 칼로 찔러 보는 남
  자애들이 있었다.
수염이 긴 남자가, 25호 집에서 사다리 위에 올라가, 창문틀을 칠하
  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그러고 있더니 거의 끝냈다.
창문틀마다 햇빛에 반짝이던 덜 마른 페인트, 어슴푸레한 새벽의 첫
  번째 빛깔처럼 아름다운 연푸른색이었는데, 느리고 꼼꼼하게 작
  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옆집 정원에서 비눗물 한 대야를 놓고 칫솔로 운동화를 닦는 남자
  애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순간을 돌에 새긴 부조상처럼, 배경 속에서 콕 집어낸
  다음 확대한 화면처럼, 폼페이 전시에서 봤던 모습들처럼 볼 수
  가 있다.
담요 털던 여자는 흔들다 말고 딱 멈춰서, 그 광경에 시선을 사로잡
  히고, 담요는 탄성을 잃고 벽에 그대로 부드럽게 풀썩였다.
여자는 그대로 팔을 뻗은 채, 입술은 소용돌이치는 먼지를 막으려
  오므린 채였다.
담요가 지상을 향해 현수막처럼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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