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약속을 하고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홍수에 익사한 남자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죽음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아직 많은 남자들이 이처럼 끝없는 기다림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 남자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약속을 했다. 이 약속 역시 무모하기는 매한가지였는데 그 이유는 상대방이 약속에 동의하기는커녕, 내용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이 남자는 익사한 그 남자와 별반 다름없는 약속을 했다. 다행인 건 기다리는 장소가 다리 밑이 아닌 것이요, 불행한 건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금 더 이 약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야겠다. 이 남자는 그녀와 식사를 하는 약속을 했다. 다시 한 번 앞 문장을 주의해서 읽어주길 바란다. 그녀와 약속을 한 게 아니라, 그녀와 식사를 하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 남자는 매일 같은 거리를 걷는다. 봄이면 꽃, 여름이면 매미, 가을이면 귀뚜라미가 기다리는 논두렁을 지나 산기슭을 깎아 새로운 동을 짓고 있는 아파트를 가로질러 가면 어설프지만 그를 반기는 조그만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는 턱수염을 긁적이지만 절대 스프에는 수염을 빠뜨리지 않는 덩치 큰 아저씨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이 남자는 이 레스토랑의 주인 아저씨의 위생정신에 감동하여 여기에서 그녀와 첫 식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이 남자는 아침, 저녁으로 이 길을 걸었다. 같은 거리를 하루에 두 번 걷는데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은 달랐다. 논두렁 부근에서는 주로 아이들을 아침에 보았고, 저녁 무렵에는 이 남자보다 어리지만 부러진 청소도구를 챙겨와서 저축일을 묻는 다부진 청소년들을 만났다. 아이들이 빠져나온 아파트를 아침에 지나다보면 건설 현장의 헬멧을 쓴 아저씨와 어느 흑인 가수가 했던 동그랗고 커다란 파마를 한 아주머니가 프랑스어와 몽골어를 섞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물론 이 남자는 두 외국어 모두 알지 못했다. 그리고 밤에는 개와 고양이만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풍광이 극심하게 다른 곳은 상가였다. 아침엔 피난을 떠난 거리처럼 철판으로 동여맨 문들로 즐비한데, 저녁 때 지나면 이보다 축제인 거리가 없었다. 레스토랑의 주인 아저씨를 만난 건 아침이었는데 패잔병처럼 처참한 몰골이었다. 레스토랑의 철문을 걸어잠근 자물쇠를 수류탄처럼 오른손에 꽉 쥐고 안전핀마냥 열쇠를 왼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장렬한데다 눈은 이미 죽었는지 감고 있어서 주인 아저씨를 보는 순간 이 남자는 허리를 숙이고 하늘에서 전투기가 날아다니는지, 주변 건물의 옥상에서 스코프가 햇빛을 반사하는지 확인했다. 주인 아저씨의 입가에 흐르는 붉은 것이 피가 아닌 복분자주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어쨌든 이 남자는 주인 아저씨에게 구세주였기에 레스토랑의 조명 사이의 어둑한 곳에서 주인 아저씨의 고백을 들어주어야 했고, 그 답례로 이 레스토랑의 주방장이 아닌 주인이 손수 만들어 주는 수제 돈까스를 그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구두의 쿠폰을 발급받았다. 애인하고 같이 오라는 주인 아저씨의 복분자 향기나는 얼굴에 애인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거니와, 애인의 한자가 이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이미 그녀가 떠올랐고 이 남자는 그녀와 식사를 하기로 주인 아저씨와 약속했다.

@wonw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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